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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공비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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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지리산 공비 토벌은 한국 전쟁 기간 중이었던 1950년 10월 4일부터 1953년 5월 1일까지 약 31개월 동안 지리산 일대에서 이루어진 조선인민유격대(빨치산) 소탕 작전입니다.
배경:


  •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로가 막힌 북한군 패잔병과 남한 내 좌익 세력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유격 활동(빨치산)을 전개했습니다.
  • 이들은 조선인민유격대, 또는 남부군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후방을 교란하고, 병력 보충, 관공서 습격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 1950년 12월 기준으로 약 2만 명의 빨치산이 지리산, 덕유산, 태백산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개:

  • 한국군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군경 합동으로 토벌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 1951년 11월 25일부터 1952년 3월 15일까지는 백선엽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전전투사령부(Task force Paik)가 대규모 토벌 작전("쥐잡이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 백야전전투사령부는 수도사단, 8사단 등 2개 사단과 4개 전투경찰 연대 등 총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 미 군사고문단이 작전, 통신, 공중 지원 등을 도왔고, 미 공군기를 이용한 공중 폭격도 이루어졌습니다.
  • 토벌 작전의 주요 전략은 작전 지역을 구분하여 지리산 지역을 우선 집중 소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 토벌군은 견벽청야 작전으로 빨치산의 보급로와 은신처를 없애기 위해 가옥과 시설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소개시키기도 했습니다.

결과:

  • 31개월에 걸친 대규모 토벌 작전으로 남한 내 빨치산의 90% 이상이 소탕되었고, 좌익 세력은 와해되었습니다.
  • 하지만 토벌 작전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희생도 발생했습니다.
  • 1951년 2월 7일에는 국군 11사단이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중 함양, 산청 등지의 민간인들을 "통비분자"(내통자)로 간주하여 집단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은 한국전쟁 중 후방의 안정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지만, 민간인 희생이라는 아픈 역사도 남겼습니다.

지리산 공비 토벌
배경
시기1948년 ~ 1955년
장소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대
원인여순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잔존 남로당 계열의 빨치산 활동
교전 세력
대한민국대한민국 국군, 대한민국 경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지휘관 및 지도자
대한민국이승만
조병옥
김종원
백선엽
김창룡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현상
김지회
박종근
정준영
최현
결과
영향남부군 완전 소탕, 공비 활동 종식
피해 규모
대한민국군경 사망 7,787명
민간인 사망 4,758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사살 11,914명
생포 5,988명
귀순 2,98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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